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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우젓처럼 요긴한 삶이여! 강화 소창과 갈비젓국

서울에서 다리 하나만 건너면 쉽사리 만나는 근교 나들이 강화도를 가리켜 흔히 역사의 섬, 호국의 섬이라고 한다.
제주도와 거제도, 진도에 이어 우리나라에서 네 번째로 큰 섬 강화도는 섬 전체에 유구한 역사가 굽이굽이 서렸대도 과언이 아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선사시대의 흔적 고인돌부터 대몽항쟁의 거점이자 서구 열강의 침략을 온몸으로 막아온 마지막 관문과 같은 섬.
하지만 내게 강화는 그 모든 통한의 역사를 뒤로하고 계절마다 흥분시키는 식도락의 땅이기도 했다.
지금처럼 봄바람 살랑거리면 숭어회, 봄 내음이 깊어지면 병어회, 녹음이 짙어지면 밴댕이, 가을이면 통통하게 살 오르는 대하(엄밀히는 양식 흰다리새우)와 갯벌장어 등.
강화 특산품 순무와 고구마도 있지만 갯것들만으로도 강화는 충분히 사계절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그리고 강화는 무엇보다 마니산의 땅이다.
강화 8경에 속하는 마니산은 강화도 남서단이자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했다고 한다.
해발 472.1m의 마니산 정상엔 익히 알다시피 단군왕검이 천제를 올리던 참성단(塹城壇)이 정상에 자리 잡고 있다.
지금도 개천절이면 제례가 행하고, 전국체전의 성화가 채화되는 민족의 영산.
나는 마니산을 퍽 좋아한다.
등정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 않거니와 마니산은 한민족의 일원임을 자부하는 나의 정체성을 일깨운다.
아들내미 태권도 도장에서 가을 캠프로 해마다 마니산 등정을 떠나는 이유와 비슷할 것이다.
근데 마니산도 아니고 로컬100에 '강화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 이름 올린 것을 봤을 때 솔직히 의아했다.
몇 해 전, 국내 자본으로 설립된 최초의 방직공장을 거대한 카페로 변신시킨 명소를 다녀온 터라, 이것 외 또 어떤 볼거리가 있을지 궁금했다.
그러나 이번에 둘러본 '강화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는 재미를 넘어 감동과 쾌감까지 선사했다.
1933년 강화 최초의 인견 공장 '조양방직'이 설립된 이후 1970년대까지 강화에는 무려 60군데가 넘는 방직공장이 있었다.
현재도 6개의 소창공장이 옛 방식 그대로 소창을 직조하고 있다니 놀랍기도 했다.
소창, 인견 제조로 명성 자자했던 강화직물의 역사와 문화를 보존하기 위해 폐 소창공장 '동광직물'을 생활문화센터로 개관하고, 1938년에 건축된 한옥과 염색공장이었던 '평화직물' 터를 리모델링하며 '소창체험관'으로 운영하고 있다.

소창은 옷이나 행주, 기저귓감으로 많이 쓰는 천으로 목화솜에서 뽑아낸 실로 짠 천인데, 일제강점기 때부터 면화를 인도네시아나 파키스탄에서 수입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도시화, 산업화를 거치면서 지금에야 대구가 직물산업으로 유명하지만 강화는 수원과 더불어 3대 직물 도시였습니다. 강화읍 권에만 60여 개 공장이 성행했고, 4000명이나 되는 직공들이 근무하면서 경제 활동을 했지요. 큰 방직공장은 임금도 후하게 쳐줘서 당시만 하더라도 어린아이도 일하던 때라, 열 몇 살 된 어린 직공들도 방직공장 다니는 게 꿈이었던 시절이었죠. 12시간 주야간 교대하며 먼지 사이에서 근무했습니다"
문화해설사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아무래도 서울의 배후도시였던 것도 한몫했을 터, 그러고 보니 강화는 예부터 화문석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화문석(花紋席) 하면 이름 그대로 꽃무늬를 놓은 자리 꽃돗자리.
특히 강화의 강화 왕골은 순백색 완초의 기질이 있어 엮었을 때 문양이 기품 있고 아름다우면서 튼튼하고, 보온과 통기성이 뛰어난 인기 특산물이었다고 한다.
왕실이나 벼슬아치의 초상에도 어김없이 등장하는 강화 화문석은 이미 고려 때부터 외국으로 수출과 동시에 사신에게 선물하던 극상품으로 명성 자자했다.
최고의 화문석을 짜던 강화 사람들의 손길은 방직으로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맨 처음 수입해 온 콘 형태로 둘둘 말린 원사를 풀어서 타래를 만드는데 원래 목화에서 뺀 실은 약간 누렇다. 이 면사를 풀어 풀을 먹이며 삶고, 말린 풀을 건조해야 한다.
"가마솥에 끓이면서 표백과정을 거친 후 옥수수 전분으로 풀 매김을 하죠. 이걸 또 건조하는 데 봄이나 여름처럼 날씨가 좋을 때는 사흘이면 자연건조가 되고 겨울에는 한 일주일 정도 말려야 해요."
어느새 뽀얗고 부들부들해진 실을 씨실과 날실을 따로 뽑은 뒤 베틀에서 서로 교차시켜 평직물로 만드는 이 모든 과정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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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녘 마산에서 자란 나는 한 시절을 풍미한 '한일합섬'과 친숙한 터라 방직의 흔적에 묘한 향수를 느낀다.
솔직히 소창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되뇐다.
성격 깔끔한 나의 엄마는 삼남매 기저귀를 이 소창으로 만들어 쓰셔서 부뚜막에선 늘 이 소창 기저귀를 삶던 기억이 있다.
아니, 내 기억 속의 소창은 행주일지 모르겠다.
엄마는 지금도 소창행주를 삶아 쓰니까.
소창은 발진이나 땀띠, 아토피에도 효과 있어서 지금도 꾸준히 수요가 있다니 반갑다.

"천이 다 완성되면 강화 여인들은 직접 이 방직물을 둘러매고 삼삼오오 조를 이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직접 판매를 했습니다. 지금의 '방판' 격이죠. 중간상인 없이 직접 팔았으니 아무래도 마진이 좋았겠지요? 배 조금 타고 나서면 북한 개풍이 가까워 그리도 많이 가셨다네요. 강화도 여인들이 억척스럽고 뻔뻔하단 말을 많이 듣는데 이 천 쪼가리들을 둘러메고 가는 건 물론 앞치마에다 새우젓 싸 갔답니다. 집마다 돌아다니다가 배고프면 아무 부엌이고 들어가 신세 지며 밥 한 덩이 겨우 얻어 이 강화 새우젓 하나를 찬 삼았습니다."
방직물을 직접 '방판'했다는 이야기도 새로운데, 강화도 새우젓을 주머니에 끼고 다녔다니 이 얼마나 놀라운 이야긴가!
필시 농사 비수기에 전국으로 품팔이하러 나선 강화 여인들에게 물기 꽉 짠 새우젓 한 점은 유일하게 싸다닐 수 있는 찬이었을 터, 그 얼마나 고맙고 귀한가.
전국 물량의 70~80% 담당하는 강화 새우젓, 혹은 젓새우.
서해안 전 지역에서 많이 잡히는 게 젓새우지만, 강화는 드넓은 갯벌로 새우의 서식 환경이 좋은데다 무엇보다 한강과 임진강 두 개의 거대한 강물이 바다로 흘러든 터라 젓새우의 맛이 월등하다고 전한다.
짠맛이 강하기보다 들큼하면서도 담백해 지금도 늦가을 김장철이면 강화 새우젓을 사려는 인파로 섬이 들썩인다.
그리고 강화의 새우젓이 낳은 소박한 향토음식이 바로 젓국갈비다.
이름에서부터 느껴지는 포스, 갈비젓국이 아니라 '젓국'을 당당히 앞에 놓은 바 이 음식의 주재료는 갈비도 호박도 두부도 그리고 냄비를 수북하게 덮은 배추도 아닌 '젓국'이다.
바로 새우젓이 이 모든 재료를 압도하는 주인공이다.

조그만 돼지고기가 뼈다귀 살점 몇 덩이 있는 것으로 보아 '갈비'라는 이름이 거들긴 했으나 새우젓이 주는 파급력을 능가할 수 없다.
고기붙이의 기름기가 분명 더해지긴 했으나 이 슴슴하면서도(표준어는 심심하다지만 여기선 슴슴이 어울린다) 배추에서 우러난 단맛, 젓새우가 선사하는 더 찝찔한 감칠맛의 조화는 도드라지는 재료 하나 없이도 오묘한 맛을 낳았다.
특히 갈비보다 살짝 숨죽은 배추가 일품이다. 육수에 채소를 데치는 '샤부샤부' 이전에 강화 사람들은 젓국 하나로 이렇게 멋진 작품을 낳은 것이다.
두부며, 호박이며, 어느 하나 제 잘났다고 나서는 녀석 없이 맛이 둥글둥글하다. 먹고 나면 속이 편안하고 부드러워진달까?
"외포리가 새우젓으로 유명하지만, 저희 가게는 창후리에서 젓을 떼 옵니다."
강화 창후리는 교동도 길목, 교동 앞바다는 강화에서도 최고의 새우잡이 터로 꼽힌다. 강화에서 최고라면 전국 최고일 터 - 지금도 강화엔 몇 개의 여남은 젓국갈비 가게가 성행 중이다.
맛이야 대동소이하지만 절대 인공감미료로 흉내 낼 수 없는 새우젓의 미미한 감칠맛이 분명 뛰어난 집이 있으니 가게 선택이 중요하다.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 정말 맛있는 음식은 반드시 담백하다고 한다.
흔히 평양냉면 같은 고급 음식에 더러 차용되는 말이지만 나는 젓국갈비를 대미필담이라 이야기하고 싶다.
애호박의 단맛, 배춧잎의 구수한 맛을 끌어올리는 저 미미한 새우젓이 맛의 한 끗을 좌우한다.
오늘 소창의 역사를 알고 나니 이 새우젓이 유독 달라 보이는지 모른다.
방직팔이에 나선 억척스러운 강화 여인들의 쉰밥, 찬밥에 더없이 요긴했을 이 새우젓을 생각하면 그만 울컥, 해진다.
그리고 끝내, 나와 어린 동생 둘 다 소창 기저귀 삶아 키운 엄마를 또 생각한다.
맙소사, 강화도에 사는 함민복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눈물은 왜 짠가, 새우젓은 왜 이다지 짠가, 우리네 인생은 왜 이렇게 애잔한가.
로컬100 칼럼 작성 차 들렀다니, 갖은 이야기 다 들려주시며 무척이나 친절하셨던 소창체험관과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 직원들과 문화해설사에게도 다시 또 감사하다.
세상은 이리 감사할 일이 도처다.

◆ 소창체험관
주소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20번길 8
영업시간 | 매주 월요일 휴관 / 오전 10시~오후 6시
문의전화 | 032-934-2500
※ 소창 스탬프 체험(매일) 20분 이상 (무료, 단체 시 사전예약)
◆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
주소 |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문안길 35
영업시간 | 1월 1일, 명절 당일, 매주 월요일(월요일이 공휴일이면 다음날 휴무)
운영 10:00, 11:00, 13:00, 14:00, 15:00, 16:00 (회당 약40분 소요)
문의전화 | 032-934-8708
※ 직조체험 무료 프로그램 (초등학생 이상, 정원 10명) : 예약 전화
☞ '강화군' 누리집 '동광직물 생활문화센터' 바로가기

◆ 이윤희 방송작가, 로컬문화 전문가
TV조선 '식객 허영만의 백반기행', KBS '한식연대기', 넷플릭스 '삼겹살 랩소디', 스카이트래블 '한식기행 - 종부의 손맛' 등 우리 식문화를 소재 삼아 다양한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집필했다. 방송작가 22년 차지만 언제나 현역~! 지역마다의 고유한 맛과 멋을 알리는 맛깔난 글을 쓰고 싶다.